Esoruen / 옥도사변 / 타니자키 / 색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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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사와, 왜 이렇게 늦었어? 순찰하다가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사에키는 거의 3시간 만에 특무실로 돌아온 아리사와에게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보통 이 근처를 순찰하는 데에는 30분 정도면 충분하고, 무슨 트러블이 있다 해도 1시간 안에는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무려 3시간이나 지난 뒤에 돌아오다니. 누가 생각해도 수상하다고 여길 터.
“별 일 없었어. 길 잃은 사람이 있어서 안내해 주고 오니 이렇게 된 것 뿐이지”
아리사와는 자신을 걱정하는 사에키에게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답했다. ‘흐음’ 사에키는 별로 믿기지 않는 다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자세한 사정을 묻지는 않았다. 자신은 무슨 심각한 일이 있었을까봐 걱정하는 거지, 그게 아니라면 추궁할 필요가 없다. 제 호기심을 위해 그의 사생활까지 침해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사에키가 입을 다물자 이번에는 에노키 차례였다. 사에키와 함께 서류정리를 돕고 있던 그녀는 방으로 돌아가려는 아리사와에게 다급하게 말을 붙였다.
“아리사와, 그건 사왔어요?”
“그거?”
“아까 순찰 나갈 때 제가 부탁했던 거요!”
“…아! 그거. 맞아. 사왔었지. 미안해. 까먹을 뻔 했네”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아리사와는 품에서 작은 별사탕 봉지를 꺼냈다. ‘여기. 돈은 됐어, 선물이야’ 다정한 말과 함께 과자를 넘겨준 그는 습관적으로 에노키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돌연 손을 멈추었다. 허공에 붕 떠서 멈춘 손은 3초정도, 그녀의 머리 위에서 머무르다가 멀찍이 떨어졌다.
“맛있게 먹어, 그럼 이만”
“아… 응. 고마워요”
방금 그건 누가 봐도 어색한 손동작이었다. 거기에 이상함은 느낀 건 당사자뿐만이 아니었다. 사에키는 아리사와가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 슬쩍 에노키의 귀에 속삭였다.
“아리사와, 무슨 일 있는 것 같지?”
“으음. 별거 아닐 거예요. 너무 걱정 마요 사에키”
“응? …에노키, 아리사와가 무슨 일 때문에 저러는 지 아는 거야?”
자신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는데. 사에키의 의아한 얼굴과 달리 에노키는 이것이 익숙한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별사탕 봉지를 뜯을 뿐이었다.
“아마도, 여자 친구를 만나고 온 거라고 생각해요”
“여자 친구?”
“응. 아리사와, 언제나 여자 친구를 만나고 오면 나에겐 스킨십을 하지 않거든요. 최근에 알게 된 거지만”
그런 거였나. 사에키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확실히 이런 사소한 건 본인이 아니면 모를 법도 하니 몰랐다 쳐도, 그녀가 말하는 ‘여자 친구’라는 건…
‘밀회라도 하고 온 건가’
아리사와는 기본적으로 연애에 대한 태도가 가벼운 인물이었다. 마음에 드는 상대가 있다면 쉽게 유혹했고, 그 상대도 승낙하면 간단히 침대까지도 가곤 했다. 아마 에노키가 말한 여자 친구는 연인을 말하는 게 아니라 가볍게 원나잇 했던 상대들을 말하는 거겠지. 불행하게도 그는 잘생긴 것뿐만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매력적이어서, 이성에게도 동성에게도 쉽게 호감을 사곤 했다. 아마 저렇게 순찰을 나가는 척 유희를 즐기고 온 것도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이리라. 그러니까 에노키조차도, 작은 변화로 아리사와의 행적을 읽게 된 걸 테고.
“타니자키에겐 비밀로 해야겠죠?”
“어? 으응. 그렇겠지?”
사실 말해줘도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데. 아니, 그래도 역시 기분 나빠 하려나. 복잡한 마음이 드는 사에키는 지금은 여기 없는 동료에 대한 걸 떠올렸다.
타니자키와 아리사와는 연인이라고 하기엔 허술하고, 동료라고 하기엔 복잡한 관계에 놓여있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아리사와는 타니자키가 마음에 들어 자주 치근거리고 다정하게 굴며 몇 번 정도 잠자리도 가졌지만, 타니자키는 여전히 아리사와를 완전히 좋아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 성격에 아리사와의 페이스에 휘말려 주거나 동침하는 걸 보면, 완전히 질색하는 건 아닐 텐데. 다른 사람과 잤다는 사실을 알면, 화를 내지 않을까.
‘뭐, 원래 남의 연애에는 함부로 개입하는 게 아니니까’
일단은 아리사와를 위해서라도 모른 척 해주자. 사에키는 마지막으로 남은 서류를 올바른 자리에 놓으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 ❋ ❋
타니자키는 밤늦게야 특무실로 돌아왔다.
모두가 잘 준비를 하느라 조용한 건물. 바람소리도 들리지 않는 복도. 같이 임무를 나갔던 키리시마는 피곤한지 곧장 자러갔고, 홀로 남은 그는 곧 자정이 다 되어가는 와중 오늘 분량의 단련을 하지 못한 것이 거슬려 혼자 단련장으로 향했다. 마음 같아선 오래 있고 싶지만, 내일도 일을 해야 하니 적당히 하고 자야겠지. 단시간에 집중해서 팔굽혀펴기라도 할 작정으로 단련장의 문을 열자, 안에는 익숙한 얼굴이 서있었다.
“여어, 타니자키. 왔어?”
“…?”
아리사와가 왜 여기 있지. 타니자키는 이해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본인 입으로 운동은 질색이라고, 단련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그가 이 시간에 단련장에 있다니. 누가 봐도 자신이 올 것을 예상하고 기다렸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왜 자신을 기다린 거지. 어차피 시답지 않은 이유, 그러니까, 보고 싶어서 라던가 할 말이 있어서겠지. 당황하지 않고 그에게 다가간 타니자키는 말끔한 얼굴로 웃고 있는 상대방에게 물었다.
“네가 왜 이 시간에 여기 있지?”
“타니자키가 여기 올 걸 알았으니까”
“할 말이라도?”
“딱히. 그냥… 대련이라도 할까 해서?”
이건 의외인데. 진심인가. 그는 아리사와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나랑?”
“응. 이쪽이 타니자키랑”
“왜?”
“자신도 변덕을 부리고 싶은 날 정도는 있어, 타니자키”
코가 마주 부딪칠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얼굴이 아름답다. 정말이지, 쓸데없이 잘생겼다는 말은 분명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게 분명했다. 타니자키는 먼 서양의 조각상 마냥 번듯하게 생긴 그 얼굴을 밀어내려다가, 문득 익숙하지 않은 체취에 멈칫했다.
여자. 이건 분명 여자의 냄새다.
특무실에는 불행하게도 여자가 적었다. 이 건물에 있는 여자라곤 옥졸 동료인 에노키와 식사 담당인 키리카, 그리고 빨래 담당의 아야코뿐이었지. 그렇기에 타니자키는 익숙하지 않은 이성의 냄새를 단번에 외부인의 것이라 단정 지을 수 있었고, 곧바로 제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까지 눈치 챌 수 있었다.
“내기 하나 할까, 타니자키. 이긴 쪽이 진 쪽의 소원을 들어주는 거야”
킥킥. 소리 내어 웃는 입술엔 생기라곤 없었다. 창백한 피부와 어울리는 색을 가진 가는 입술. 자신은 저 입에 몇 번이나 입을 맞췄던가. 그건 알 수 없지만, 아리사와와 가장 많이 키스한 것이 자신이 아니라는 건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바깥에 있을, 자신은 이름도 모를 수많은 원나잇 상대들. 그걸 생각하자 타니자키는 뱃속이 뜨거워져,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 라. 누가 봐도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이다. 무기를 고쳐들고 거리를 둔 그는 기꺼이 아리사와가 먼저 공격 할 수 있게 시간을 주었다. 아리사와의 특기는 기습. 어차피 제가 유리한 대결이니, 이정도 페널티는 주고 싶었다.
‘갈게?’ 마찬가지로 거리를 두고 무기인 가위를 꺼내든 그는 타니자키를 지그시 보며 자세를 취했다. 덤벼들 건가, 가위를 날릴 건가. 자신은 그의 반응을 알 수 없지만, 불행하게도 아리사와는 타니자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사토리였으니까. 상대방의 생각 같은 건 손에 있는 사탕의 껍질을 까먹는 것 보다 간단히 알 수 있었다.
하나. 둘. 입모양으로 카운트를 세던 아리사와는 왼손에 든 가위를 던지고 곧바로 돌진했다. 그렇게 나오는 건가. 타니자키는 어느 정도 예상범위에 있던 행동이라는 듯 태연하게 가위를 쳐내고 아리사와를 기다렸다. 자, 어디를 찌를 건가. 목? 가슴? 그것도 아니라면, 눈이라도 찌르나? 방어태세를 취한 그는 아리사와의 몸이 제 바로 앞까지 다가왔을 때 오른손의 가위가 제 옆구리를 향하고 있단 걸 캐치했다.
“어림없다!”
쿵. 제게 덤비는 그를 간단히 발로 차 넘어뜨린 타니자키는 가위가 스친 제 몸은 신경도 쓰지 않고 아리사와의 위에 올라탔다. ‘아아, 졌네?’ 패배를 너무나도 간단히 받아들인 아리사와는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고 피가 묻은 가위를 내려놓았다.
“내 패배야. 이제 그만”
“…간단히도 포기하는 군…”
“거야 자신은 기습이 실패하면 못 이기니까? 뭐어, 상황판단이 빠르다고 할까”
“쯧”
역시 싫은 녀석이다. 저 능글능글한 말투도, 지독하게 잘생긴 얼굴도, 누구든 꾈 수 있는 달콤한 말투도. 다 진절머리가 난다. 비록 자신도 아리사와에게 꼬여 여러 번 잠자리를 가진 주제에 이런 말은 하면 안 될지 몰라도, 그는 아리사와와 자는 모든 여자들을 바보라고 생각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속아 넘어간 바보라고.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그리고 물론,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다.
“소원은 뭘 빌 거야? 자신이 들어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들어줄게”
“…뭐든?”
“뭐든”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상대에게 독촉 받는다는 건 상당히 불쾌한 일이다. 어차피 다 알고 있으면서, 굳이 입으로 내뱉어 주길 원하다니. 악취미. 악취미 중에서도 제일가는 악취미다.
“…그럼, 가만히 있어”
“가만히?”
“그래, 한 1시간 정도”
어차피 거창할 소원을 빌 생각도 아니었다. 자신은 그냥 지금 좀. 제 밑에 놓인 상대에게 화를 내고 싶을 뿐이니까.
이런 녀석에게 일일이 휘둘리는 자신이 싫다. 도대체 다른 동료들은 다 두고 왜 자신에게만 이렇게 질척하게 매달리는지 모르는 아리사와도 싫고, 이 멍청이에게 홀려 침대로 따라 들어가는 수많은 애인들도 싫다.
단련을 하려는 계획도 이 녀석 때문에 거의 망치고 말았으니, 이정도 화풀이는 괜찮을 거다. 대뜸 움직이지 마라는 소원으로 아리사와의 손발을 묶은 그는 그의 옷을 벗기며 말라빠진 몸에 남은 흔적들을 찾아보았다.
온 몸에 풍기는 여자 화장품 냄새. 몸 여기저기에는 울긋불긋한 키스마크. 심지어 어깨와 등에는 손톱자국까지 있다. 어디서 뭘 하고 다녔는지 굳이 물을 필요도 없는 몸에 타니자키는 기가 차다는 듯 실소했지만, 오히려 아리사와는 당당했다.
“왜 그래. 이쪽이 이러고 다니는 걸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질투라도 하는 거야?”
누가 봐도 상대가 더 곤란한 상황인데, 말투만 보면 오히려 이쪽이 아래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타니자키는 대꾸도 않고 그 몸에 새겨진 키스마크 위에 이를 세웠다. 이름 모를 상대의 흔적을 물어뜯으려는 듯, 아프고 아프게.
“질투구나”
귀엽긴. 아리사와의 목소리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가득했다. 제가 위협당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처럼. 그저 기쁘고 즐거워, 어쩔 줄 모른다는 듯 웃으며…
❋ ❋ ❋
평소와 다른 정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아 끝이 났다. 평소라면 아리사와에게 잔뜩 휘둘리고 그가 질릴 때 까지 침대에서 구르는 게 일상이었지만, 오늘은 그 반대였으니까. 포지션은 별 다를 것 없다. 제가 박고, 아리사와는 삼킨다. 다만 주도하는 쪽이 다를 뿐. 오늘은 제가 잔뜩 휘둘렀을 뿐, 그것 외엔 별 다를 것도 없는 정사였다.
축 늘어져 잠든 아리사와를 보는 타니자키의 눈은 심란함으로 가득했다. 분명 아까 전까진 아무 죄책감도 들지 않았는데, 막상 일을 치루고 나니 왜 이렇게 생각이 많아지는지. 그는 제가 개인방도 아닌 이런 공용 공간에서, 상대를 제압해가며 밤일을 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었다. 아니, 애초에 화가 나서 누굴 안는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어쩌다가, 이런.
‘다 이 녀석 때문이지’
체액을 닦아주고 대충 옷을 입힌 아리사와를 안아든 그는 일단 욕실로 향했다. 그냥 자기엔 너무나도 찝찝하니 씻고 씻겨야지. 타니자키는 피곤한 걸음으로 단련장을 나섰다.
❋ ❋ ❋
아리사와가 눈을 뜬 것은 이른 새벽이었다.
온 몸이 얼얼하고, 하반신은 쿡쿡 쑤신다. 어젯밤 일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정신이 든 그는 지금 자신이 타니자키의 방에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곧바로 옆을 보았다. 아아, 있다. 제 바로 옆자리에 누워 자는 타니자키를 발견한 아리사와는 입꼬리가 귀까지 닿을 정도로 웃어보였다.
설마 타니자키가 자신을 자빠뜨려서 강제로 안는 날이 오다니. 그것도 질투에 눈이 멀어서, 분노에 차서 그런 짓을 하다니.
분명 몇 년 전의 그였다면 오늘 같은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 외도를 한 자신을 신경 쓰지도 않았을 것이고, 화가 났어도 두들겨 패거나 잔소리를 하지 육체관계로 감정을 표출하진 않았겠지. 좋은 변화다. 드디어 타니자키의 안에도, 색욕이라는 것이 자리를 잡은 것이란 뜻일 테니까.
“좀 더 나를 원하는 게 좋을 거야, 타니자키”
너는 이런 걸 좀 더 즐길 필요가 있어. 마음속으로 속삭인 그가 잠든 연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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